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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석굴암

국보 제109호 군위 삼존석굴

군위 제2 석굴암은 경주 석굴암 석굴보다 100년 정도 앞서 7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석굴에는 아미타여래를 본존불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두고 있다. 바위에 불상을 새기던 삼국시대 석굴사원과는 달리 석굴을 파고 불상을 모신 정통 석굴사원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굵직한 선과 조형으로 풍만하여 듬직한느낌을 준다.
커다란 나발(螺髮)과 육계(肉髻), 도톰한 이목구비 그리고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아래 무릎과 대좌까지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이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제 2 석굴암은 바위에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신 전통 석굴사원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곳이다. 석굴 앞에 중국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모전 석탑이 일부 복원되어 있으며 비로자나여래를 모신 비로전을 별도로 두고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팔공산 자락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독특한 형태의 사찰이다.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은 삼존석불이 모셔진 이후인 9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당시에 유행하던 신라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상의 변천과 신앙 추이를 확인할 수 있다. 원래는 파괴된 대좌와 함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0 m북쪽에 있었으나, 1990년 대웅전을 늘려 지으며 대좌와 불단을 새로 만들고 옮겼다.

석굴 앞 마당에 있는 모전석탑. 지금은 단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3층이었다고 한다.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써 작자와 유래는 알 수 없다. 본래 3층이었으나,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도 같이 무너졌다고 한다. 1949년 군위군 우보면 신도들의 힘을 모아 현재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는 400 cm, 기단의 한 변은 390 cm이며, 우주와 탱주는 약 16 cm, 옥개석에서 정상부까지는 약 165cm이다. 모서리 기둥과 각 면 3개의 안 기둥 및 기단 덮개돌이 있으며, 1층 탑신부에는 약 20여 단의 일정하지 않은 직사각형 판석을 쌓았다. 1층 지붕돌의 층급은 3단이며 지붕돌 상면에도 다시 여러 단의 층급을 놓아 점차 체감되게 하였고 다시 그 상부 중앙에 노반 및 보주를 배치하였다.

군위 한밤마을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은 신라 시대인 950년경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로 이주하면서 부계 홍 씨 일족이 번창하였으며, 1390년 문과에 오른 홍로라는 선비에 의해 대율로 개칭되었다.
팔공산이 북쪽 자락에 자리를 잡아 있어 사방으로 경치가 대단히 수려하며 마을 전체의 집들이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을의 주택은 대부분 전통 한옥 구조로 그 대부분이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던 것을 1970년대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긴 하였으나, 유형문화재 ‘군위 대율리 대청’ 등의 지정문화재를 위시한 일부 가옥들은 전통 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경오(1930)년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축조방법은 막돌 허튼 층 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은 1m 이상인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매우 예스러운 골 목길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보존 또한 잘 되어 있다.

화본역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북4리 화산마을이다. 화산마을에서 내려다보는 군위댐 등 주변 경관, 일출과 일몰, 운무는 대구경북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장관이다. 마을이 화산(828m)자락 해발 700m에 자리해 천혜의 절경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 농촌 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과 달리 화산마을은 60년 전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 1962년 개간촌 운동으로 임야를 개간해 밭을 만들고 그 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산 정상에서 캠핑장 이용도 가능해지면서 트래킹을 즐기는 방문객과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며 자연을 느끼고 몸과 마음의 힐링을 위한 도시민의 방문도 이어지고 있다. 화산마을 주변에는 조선 숙종 35년에 축성됐던 경북도 기념물(47호)로 지정된 화산산성과 지휘·통제소인 괴헌정 등의 역사 자원도 있다. 화산마을 주민은 대다수가 고랭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2019년 농림부의 행복마을 만들기 콘테스트에서 경관 환경분야 금상을 받았다.

풍차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화산마을의 공식지명은 군위군 고로면 화북4리로서 뒷산의 지명을 빌려 통상 화산마을이라고 합니다.

화산마을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은 신라 시대인 950년경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로 이주하면서 부계 홍 씨 일족이 번창하였으며, 1390년 문과에 오른 홍로라는 선비에 의해 대율로 개칭되었다.
팔공산이 북쪽 자락에 자리를 잡아 있어 사방으로 경치가 대단히 수려하며 마을 전체의 집들이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을의 주택은 대부분 전통 한옥 구조로 그 대부분이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던 것을 1970년대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긴 하였으나, 유형문화재 ‘군위 대율리 대청’ 등의 지정문화재를 위시한 일부 가옥들은 전통 마을로서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경오(1930)년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축조방법은 막돌 허튼 층 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은 1m 이상인 경우도 있다.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매우 예스러운 골 목길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보존 또한 잘 되어 있다.

인각사

이곳에는 고려의 명승 일연스님이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저술한 천년 고찰 인각사가 자리잡고 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특히 이 곳에서 구산 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했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전국불교의 본산임을 알 수 있다. 사적 374호로 지정된 인각사는 경내에 보물 428호인 보각국사탑과 비가 있다. 사찰의 앞에는 수많은 백학들이 서식하였다는 운치 있는 학소대가 있다. 인각사에서 조금 올라가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병암과 마주치게 된다.
밑으로는 수정같은 맑은 물이 흐르고, 여름이면 매일 수 천 명씩 이곳을 찾는다.

[군위인각사석불좌상] 이 불상은 10~11세기에 제작한 불상으로, 실존하는 고승을 모델링하여 조성한 불상 양식과 계층을 같이 하고 있다. 가부좌한 두발은 가사로 덮여 있으나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얹는 항마촉지인의 두 손은 비교적 작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및 비] 보각국사 일연의 탑과 비는 고려 충렬왕 15년(1289)에 입적한 일연스님의 부도탑과 비문이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노년에 인각사에서 노모를 지극히 봉양하고 삼국유사를 저술하는 등 많은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보각국사비와 정조지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인각사 보각국사탑] 탑의 상층은 불상, 중층은 연화, 하층은 토끼·사자·원숭이 등 여러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승려 일연스님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팔각의 탑의 중심부에 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는 탑명과 사천왕입상과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인각사 보각국사비] 비는 충렬왕 21년(1295) 국사(國師)의 불제자(佛弟子)인 법진(法珍)에 의하여 세워졌다. 높이 6자, 폭 3자반, 두께 5인치인 탑신(塔身)의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민지(閔漬)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명문이며, 글씨는 왕명에 의하여 진나라까지 가서 왕희지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으며, 지금은 형체가 많이 훼손되었으나, 비문은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 알 수 있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하였다고 한다.

동명 송림사

송림사(松林寺)는 팔공산에 위치한 불교사찰이다. 행정구역상의 위치는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91-6번지이며, 조계종에 속한다. 사찰 경내에 위치한 5층의 전탑(塼塔)은 한국에서 몇 점 되지 않는 전탑 가운데 하나이다.

1970년: 황수영박사가 송림사에서 나온 개인 소장(현재는 소재지 미상)의 청동 향로 (높이 24.1cm)의 명문을 조사한 결과 『지정 2년(1342년)명 송림사향(至正二年銘 松林寺香)』이라고 되어 있어 고려 시대에 봉안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3년: 대웅전의 전면 해체 보수, 선열당 보수, 설법 전 단청공사 등의 작업이 완료되었다.

[대웅전] 선조 30년(1597년)에 소실된 것을1657년중창하였고, 그 후 1755년과 1850년에 중수하였다. 17세기 중후반의 한국 불교건축에서 맞배지붕에 다포식 주불전 건물이 일반화되었는데, 송림사 대웅전은 이에 속하는 대표적인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대웅전 안에 봉안된 목조석가삼존불좌상(木造釋迦三尊佛坐像)은 효종 8년에 조성된 것으로 2009년 3월 5일 보물 제 1605호로 승격되었다. 대웅전의 현판은 숙종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삼천불전에 봉안된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2009년에 보물 제 1606호로 지정되었다. 복장 발원문을 통해 효종 6년(1655년) 조각승 도우가 조성한 불상임이 확인되었다.

[송림사 오층전탑] 보물 제189호이다. 9세기신라의 건축물로 전고 16.13m, 기단 폭 7.3m의 전 및 화강석으로 조영된 탑이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륜부까지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본래 전탑의 규모는 현존하는 규모보다 더 작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경내에 있는 《팔공산 송림사 유적비》에는 1959년송림사 전탑의 해체 복원 당시 현재보다 훨씬 좁은 폭 4.5m 정도의 기단 석축이 발견되어 여러 차례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외형이 많이 변모 되었음을 추정할 수있다. 진신사리 4과가 청유리병에 봉안되어 있었고, 연꽃무늬를 새기고 순금을 상감한 진신사리감(龕)과 청자로 만든 진신사리감, 옥지금엽보리수, 침향 9개, 은귀걸이 17개, 나무 구슬 1개, 청옥, 백옥, 수정, 유리(琉璃), 등 옥구슬 26개가 나왔다. 유물은 현재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었으며국립대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함께 나온 발원문은 햇빛을 보는 순간 탄산(炭散)되어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합실 안에는 조선 시대 작품인 본불과 파손 석불, 동불이 각각 2구 있었다고 하며 2층의 옥개에는 금동방형 사리기를 비롯하여 유리배, 수목형 금구, 옥류 등 찬란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상륜부 전탑 내에는 화려한 고려청자 합자가 발견되는 등 시대를 달리하는 유물이 각 층에서 발견되어, 적어도 고려 시대에 상륜부가 해체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토 유물 가운데 목불과 진신사리 4과는 탑에 다시 봉안되었다.

옥포 용연사

[용연사 연혁 및 유래] 비슬산용연사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는 천년 역사와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유서 깊은 천년고찰(千年古刹)로서 신라 신덕왕 1년(912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했으며,
이 절터는 용(龍)이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절 이름을 용연사(龍淵寺)라 불린다고 한다. 특히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영남지방의 영험 기도처로 부처님의 훈훈한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용연사 적멸보궁은 임진왜란(1592년) 때 난을 피해 부처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시고 갈 예정이었으나,
승군들의 주둔지로서 비슬산 용연사가 안전함을 판단하여 용연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전란이 위급할 경우 금강산으로 옮길 예정이었으나 전란이 평정되어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 스님이 부처님 사리 2과중 1과는 본래 봉안처인 통도사로 돌려보내고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되돌아 나오면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극락전은 1728년 세운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있고,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13호), 묘법연화경 권4~7(보물 제961-3호) 이 외에도 3층 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과 14기의 부도 등이 있다.
1650년(효종 1)에 일어난 화재로 보광루만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으나 다음 해에 중건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존 당우로는
극락전, 영산전, 명부전,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선열당, 심검당, 유정당 등이 있다.

옥연지 송해공원

왜 송해 공원인가? “송해선생은 달성의 명예 군민이고, 홍보대사이며, 이곳이 처가 동네라는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6.25때 혈혈단신으로 남하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다. 원래 이름은 송복희였으나, 선상에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를 바라보면서 바다 해(海)자를 써 “송해”란 이름으로 새 출발을 다짐한다. 이후 당시 24세의 나이에 대구 달성공원에서 통신병으로 군 복무를 시작한다.

이때 옥연지가 있는 이곳 기세리에서 출생한 석옥이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실향민인 송해 선생은 여기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수시로 이곳 “옥연지”를 찾아 실향의 아픔을 달래곤 했다. 젊은 시절 고난과 함께 새로운 인생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 선생은 사후에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1983년 옥연지가 보이는 이곳 산기슭에 “묏자리”도 마련했다. 달성군은 원조 국민MC 송해선생과의 이런 인연으로 이 곳 옥연지 일대를 대구의 뿌리인 달성의 대표적 힐링
공간이자 랜드마크로 조성하고 자본인의 동의를 얻어 “송해 공원”이라는 이름을 명명하게 되었다.
송해 공원의 호수를 둘러싼 둘레길을 따라 숲속의 데크로드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힐링되는 느낌도 드실 것입니다.